[기자수첩] '취업률 80%'의 덫…코딩학원發 '다음 소희' 막아야

2025-11-24     유진 기자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 도구로 제작한 이미지. (사진=나노 바나나)

최근 즐겨보던 유튜브 채널에서 '다음 소희'라는 영화를 추천했다. 2023년 개봉작이라는데 왜 놓쳤을까 싶어 주말 저녁, 무심코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TV 앞에서 한동안 먹먹함을 삼켜야 했다.

콜센터 현장실습을 나간 여고생 소희가 담임교사로부터 '대기업 사무직'이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 설레었을까. 출근 첫날, 그 설렘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을 목격하는 건 관객인 우리도 고통스러웠다. 2017년 전주 저수지에서 숨진 채 발견된 여고 실습생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취업률'이라는 숫자가 어떻게 한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대기업 사무직이라는 환상을 안고 나간 콜센터에서 소희가 마주한 건 폭언과 실적 압박, 그리고 방관하는 어른들이었다. TV 앞에서 느낀 먹먹함은 이내 서늘한 기시감으로 바뀌었다. AI 전문기자로 현장을 누비며 목격한 국비 지원 '코딩학원'의 풍경이 영화 속 장면들과 묘하게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취업률 80%'라는 화려한 간판 뒤에서, 청년들을 소모품처럼 밀어 넣는 구조적 폭력이 그곳에도 있었다. 모집률·취업률 올리기에 목을 매는 구조, 일자리의 질보다 숫자를 우선시하는 시스템,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희망을 품었다가 좌절하는 청년들의 모습까지.

쏟아지는 예산, 길 잃은 청년들

정부는 그간 '디지털 인재 양성'이라는 명분 아래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고용노동부 등이 투입한 수천억 원의 혈세는 '개발자 양산'이라는 기조 하에 전국 각지의 코딩학원으로 흘러들어갔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사진=트윈플러스파트너스 )

문제는 시장의 시그널이다. 기업들은 신입 채용 문을 걸어 잠갔고,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초급 개발자의 설 자리는 급격히 좁아졌다. 전공자조차 취업난에 허덕이는 마당에, 6개월 속성 과정을 거친 비전공자에게 열린 문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거리와 웹에는 여전히 "비전공자 환영", "억대 연봉", "취업률 80%"를 외치는 과장 광고가 넘쳐난다. 청년들의 간절함을 담보로 한 이 달콤한 유혹 뒤에는 영화 속 학교와 똑같은 '약탈적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취업'이 아닌 '취업률'을 위한 꼼수

구조는 간단하면서도 교묘하다. 코딩학원들은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 높은 모집률과 취업률을 증명해야 한다. 수료생의 진로 적합성이나 고용 안정성은 뒷전이다. 일단 어디든 밀어 넣어 숫자를 채우는 게 지상 과제가 된다.

최근 광주에서 만난 한 코딩학원 수료생의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학원 소개로 들어간 업체는 알고 보니 명의상 대표와 실소유주가 다른, 이른바 '바지사장' 기업이었다. 5인 미만 사업장으로 위장해 근로기준법을 회피하고, 임금조차 체불했다. 그는 "개발자가 되려다 임금 체불 피해자가 됐다"며 울분을 토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 도구로 제작한 이미지. (사진=나노 바나나)

개발자 커뮤니티에도 "국비 6개월 듣고 취업했다가 금세 그만두고 다시 아르바이트 중"이라는 자조 섞인 글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에게 남은 건 허비한 6개월과, "나는 안 되는구나" 하는 패배감뿐이다. 더 아픈 건 희망을 품었다가 열악한 현실 앞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다. 영화 속 소희처럼 말이다.

숫자가 아닌 사람을 봐야 할 때

IT 강국은 코딩 기술자 머릿수만 채운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공급과 수요의 극심한 미스매치부터 해결해야 한다. 무작정 예산을 뿌려 학원 배만 불릴 것이 아니라, 산업 현장이 진짜 필요로 하는 커리큘럼인지, 학원이 알선한 기업이 청년을 품을 자격이 있는 곳인지 정부가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영화 속에서 가장 뼈아픈 대목은 "다음 학생 실습 못 나가면 책임질 거냐"며 학생의 고통을 외면하던 교사의 모습이었다. 지금 우리 정부와 코딩학원들의 모습이 그와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청년들이 원하는 건 통계용 일자리가 아니다.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고 성장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일자리다. 정부는 이제 취업률이라는 숫자 놀음을 멈추고, 그 뒤에 가려진 청년들의 얼굴을 들여다봐야 한다. 코딩학원 발(發) '다음 소희'가 나오는 비극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