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단상] 아날로그 고집하는 일본서 '디지털 아티스트' 뜬다…인공지능(AI) 시대 예술은 이런 모습일까?
일본서 꾸준한 인기 얻는 '와타보쿠' 작가 1년 새 작품 감정가 2배 수준으로 '껑충' 디지털 아트 시장도 급성장…"예술의 미래?"
선진국 가운데 유독 아날로그 시스템을 고집하는 나라가 있다. 이웃나라 일본의 이야기다. 한국에서 사라져 가는 팩스(FAX)가 일본에서는 아직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심지어 아직도 이메일보다 우편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회 전반에 레거시 시스템(legacy system·낡고 오래된 시스템)이 뿌리 박혀 있는 가운데 일본에서 '디지털 아티스트'가 급부상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두터운 매니아층 양산 중인 '디지털 아티스트'
기자는 지난해 이맘때쯤 '디지털 아티스트'에 대한 일본 내 인기를 실감했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는 지인으로부터 전시회 참석을 제안받았다. 소위 일본에서 '핫한 전시'라는 것. 전시회는 한 카페에서 열렸는데, 작품을 보기 위해 열린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여기저기서 "너무 아름답다"라는 감상평이 이어졌다.
특히 '금붕어와 소녀'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인기를 끌었다. 이 그림은 일본 내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와타보쿠(わたぼく) 작가의 작품이다. 감성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의 작품은 수많은 매니아층에게 사랑받고 있다. 부드러운 색상과 섬세한 선, 디지털 페인팅은 사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식품회사 뛰쳐나와 태블릿 펜 잡은 '와타보쿠 작가'
사실상 일본 내 디지털 아티스트의 대표로 손꼽히는 와타보쿠는 미술을 전공한 친누나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려왔다. 고등학생 때부터는 미술부 활동을 했고, 큐슈산업대학 미술학부에 진학해 전문지식과 기술을 갖추게 됐다. 대학 졸업 후 식품회사에서 근무했다. 이 당시 취미로 이어왔던 그림을 'deviantART'에 투고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2012년 식품회사를 퇴직하고 영상 회사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와타보쿠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와타보쿠라는 이름은 회사원으로서의 1인칭을 의미하는 '와타시(私)', 디자이너로서의 1인칭을 뜻하는 '보쿠(僕)'를 결합해 명명한 이름이다. 그는 데스크톱 1대와 액정 펜 태블릿 1대, 포토샵 프로그램 정도만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작품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며 일본 현지를 비롯 대만, 태국, 싱가폴,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4개국에서도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인지도를 높였다. 그의 작품은 전시가 시작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매진된다. 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작품의 가격은 20만엔(약 181만원)에서 최고 50만엔(약 454만원)까지 책정됐지만 현재는 110만엔(약 999만원)에 거래된다. 와타보쿠 작가의 인기가 높아짐과 동시에 디지털 아티스트에 대한 관심도 커진 것으로 풀이된다.
AI 시대 예술은 이런 모습일까?
그림을 그리는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예술 시장에도 변혁이 일어나는 중이다. 그럼에도 인간 작가들의 작품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뭘까. 관람객들의 감정을 흔드는 진정성과 더불어 작품에서 풍기는 특유의 감성은 AI 작품에서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와타보쿠의 작품도 그러한 이유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1년 전 기자가 그림 속에서 봤던 소녀는 '사이(さい)'라는 캐릭터로, 학창시절 실제로 알고 지냈던 친구를 모델화했다고 한다. 와타보쿠의 첫사랑이다. 그녀를 다각도로 그리면서 당시에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마음을 이해하고자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작품의 컨셉 역시 그에 걸맞는 상처, 통증, 치유, 부활 등을 주제로 표현해오고 있다.
이런 작가의 의중이 관람객에게 잘 전달이 됐는지, 해당 그림은 현재 꽤 유명한 그림이 됐다. 기술의 발전을 거듭하면서도 인간이 기술을 활용해 그린 작품이 사랑받을 수 있는 좋은 예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와타보쿠는 도쿄 파루코 뮤지엄에서 지난 8일부터 전시회를 진행하고 있다.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는 일본과 달리 국내의 경우 디지털 아티스트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적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애니메이션과 만화 산업이 집약적으로 발전해 온 부분이 있어 비교하기는 무리다. 그러나 기술과 예술의 융합 시도가 이어지는 한국에서도 조만간 디지털 아티스트가 부상할 것으로 전망된다. 뛰어난 작가들이 조명받을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는 제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