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튜링 연구소 윤리 분야 연구원 추천작
월-E·애프터 양·고장난 론·이미테이션 게임 등
사회 내 AI 역할과 기술-인간 간의 관계 조명
최근 앨런 튜링 연구소(Alan Turing Institute)의 마이리 에잇켄(Mhairi Aitken) 윤리학 분야 연구원이 인공지능(AI)에 관한 영화 10편을 추천했다. 앨런 튜링 연구소는 데이터과학과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영국 국립 기관으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AI 연구소다.
7일(현지시간) 과학 전문매체 '뉴 사이언티스(New Scientist)'에 따르면 에잇켄 연구원은 흔히 AI를 다루는 종말론적인 액션 어드벤처 영화보다는 사회 내 AI의 역할이나 기술과 인간 간의 관계 등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들을 위주로 선정했다고 전했다.
수많은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인공지능이 자체 초지능(superintelligence)을 개발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면서 궁극적으로 인류의 미래에 위협을 가하는 줄거리는 아마 친숙할 것이다. 하지만 에잇켄 연구원은 되도록 너무 친숙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이번 영화 추천 목록에서 제외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추천작들 가운데 아마 이미 본 적 있는 유명한 영화들도 꽤 있을 것이다. 현기증이 날 만큼 빠른 속도로 진화하는 AI 기술에 조금은 피로감을 느끼는 요즘 AI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들로 숨을 고르면서 잠시 쉬어가는 건 어떨까. 마이리 에잇켄의 간략한 감상평과 함께 그가 추천한 영화들을 소개한다.
조니 5 파괴 작전(원제 Short circuit, 1986)
어릴 적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만의 로봇을 간절히 꿈꿨다. 영화 속 로봇은 갑작스럽게 벼락을 맞고 살아나 사람처럼 자유의지를 갖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 거대언어모델(LLM)의 훈련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백과사전을 비롯한 책들과 TV 프로그램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면서 세상에 대해 배운다. 생명의 불꽃이 공학이나 코딩이 아닌 자연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좋다.
그녀(Her, 2013)
이 영화가 나왔을 당시 누군가는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이 여전히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온라인상에 AI 친구·연인을 제공하는 플랫폼이 빠르게 늘어나면서 이제 더 이상 그리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물론 영화에서처럼 그 관계가 상호적이고 AI가 자신의 감정을 발전시킨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영화는 AI 동반자에 대한 애정·애착이 인간 관계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심도 있게 풀어간다.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 2014)
앨런 튜링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이 영화는 AI의 초기 개발 당시 튜링이 돌파구를 찾는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가 동성애자이기에 받아야 했던 잔혹한 처벌에 대해서도 비중 있게 다룬다.
애프터 양(After Yang, 2021)
함께 살던 로봇 아이가 어느 날 반응하지 않게 되면서 벌어지는 가족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낸 영화다. 영화는 기계에 대한 감정적 애착을 둘러싼 윤리적인 딜레마와 더불어 슬픔과 상실을 주제로 흘러간다. 느린 속도로 인간의 감정에 집중한다. AI를 다룬 액션 가득한 블록버스터와는 다르지만 꼭 필요한 영화가 아닐까.
고장난 론(Ron's Gone Wrong, 2021)
AI에 관한 좋은 가족 영화. 혼자서라도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다. 영화 속 10대들은 그들 간의 우정을 이어주는 자신의 '비봇'에 집착한다. 인간관계에 서툰 주인공 소년이 처음으로 비봇을 얻었을 때 결함이 있는 고장난 비봇이라는 걸 알아챈다. 영화는 재미있는 줄거리를 통해 감시 자본주의와 소셜 미디어의 중독성, 그리고 그로 인해 젊은 세대에게 야기될 수 있는 해악을 영리하게 다루고 있다.
브라이언 앤 찰스(Brian and Charles, 2022)
영화는 놀랄 만큼 기묘하다. 주인공 브라이언은 외딴집에 홀로 살아가는 별난 발명가로 마네킹의 머리와 세탁기 몸통을 한 '찰스'라는 로봇을 만들어낸다. AI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영화가 풍기는 저차원적인 로우테크(low-tech)의 느낌에 미소 짓게 될 것이다.
로봇 앤 프랭크(Robot and Frank, 2012)
자주 깜빡하는 전직 금고털이범 프랭크는 아들에게 로봇 친구를 받는다. 그리고 곧 그 로봇이 꽤 유용한 공범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아챈다. 결국 알츠하이머 병으로 기억을 잃어가는 프랭크는 친구인 로봇의 기억을 지워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영화는 노인들을 돌보고 함께 하는 AI의 역할을 조명한다.
아이, 로봇(I, Robot, 2004)
이번 10개 추천작 가운데 유일한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다. 이 영화는 AI가 따라야 할 규칙 설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 이러한 규칙이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 예측하고 제어할 수 있는 범위와 정도에 중점을 둔다. 로봇에 관한 짧은 단편들로 이뤄진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 '아이, 로봇'과는 거리가 멀지만 AI 시스템에 안전 장치를 구축하는 것을 둘러싼 쟁점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2005)
멋진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모험 이야기다. 영화 전반에 걸쳐 AI 주제가 나온다. 생명과 우주 그리고 만사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찾는 것은 오늘날 AI에 대한 많은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외계인들이 궁극적인 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AI가 어떻게든 전달한다고 해도 우리가 그 지식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을까.
월-E(WALL-E, 2008)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아름다운 이미지, 풍부한 줄거리가 돋보이는 영화. 우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지각이 있는 인공지능에 관한 건 이미 친숙한 공상과학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월-E는 빅테크에 의해 개발·통제되는 인공지능이 점점 더 많이 사용됨에 따라 사람들이 수동적인 소비자로 변하면서 자율성을 잃어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영화는 인간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기술이 어떤 역할을 하기를 원하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AI포스트(AIPOST) 윤영주 기자 aipostkorea@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