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을 기념하며, 나 자신에게 조용한 선물을 하나 해주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제대로 된 자전거 한 대. 그동안은 생활자전거로 동네를 오가며 소소한 즐거움을 누렸지만, 며칠 전 담양 나들이에서 뜻밖의 체력 고갈로 진땀을 빼고 말았다. 그날의 힘겨움이 결국 결심이 되었다. ‘이왕이면 좋은 걸로, 앞으로 더 멀리, 더 오래 탈 수 있는 걸로.’
이곳저곳 자전거 매장을 돌아다니며 직접 발품을 팔았다. 그러다 마침내 눈에 쏙 들어오는 자전거를 만났다. 최신 기능이 집약된 스페셜라이즈드. 안장은 3단계로 조절할 수 있고, 기어 변속도 버튼 하나로 간단히 조작된다. 기능만큼이나 디자인도 고급스럽고 단단했다. 결국 큰 마음을 먹고 결제를 마쳤다.
값이 제법 나가는 자전거를 샀더니, 주위 분들이 “옷도, 헬멧도, 선글라스도, 신발도 다 맞춰야지!”라며 웃으며 부추겼다. 결국 지갑을 열어 이것저것 새로 장만했다. 그 과정에서 ‘엉덩이 보호 팬티’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입고 타보니 확실히 덜 아프다.
가장 난감했던 건 바지였다. 꽉 끼는 모습이 남사스러워 처음엔 망설였지만, 막상 입어보니 편하고 날렵하다.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이 괜히 젊어 보이기까지 한다. 어깨가 절로 으쓱해진다. 어제 오후, 자전거를 구입했던 매장에서 점검을 받고 곧장 승촌보로 향했다.페달을 밟을 때마다 예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힘이 전달되는 게 느껴진다. 영산강 자전거길은 이제 나에게 운동장이자, 힐링 로드다.
길을 따라 달리면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며 땀을 식혀준다. 양옆에는 아직 지지 않은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들꽃들은 열매를 맺으며 가을을 준비하고 있다. 갈대숲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머리 위엔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유유히 흐른다. 풀 향기, 강물 냄새, 갈잎 스치는 소리까지…보이는 모든 것이 늦여름의 아름다움이다.
땀은 흐르지만 몸은 오히려 가볍다. ‘매일 조금씩 더 건강해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비 온 뒤라 곳곳에 고인 흙탕물 덕분에 옷과 자전거는 흠뻑 젖었지만, 그조차도 오늘의 일부로 느껴진다. 다만 다음에는, 이런 날엔 물웅덩이를 좀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승촌보에 도착하니, 강물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더없이 시원하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 듯한 기운.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시원한 과일 음료 하나를 사서 데크 의자에 앉았다. 휴일 오후답게 가족 단위 나들이객들이 많다. 광주 서구 풍암동에서 왔다는 초등학생 네 명이 컵라면을 나눠 먹으며 깔깔 웃는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아,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그 아이들을 바라보다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자전거를 배우다 넘어지고, 친구들과 동네 밖으로 처음 나갔던 그 설렘. 그때는 아무것도 없어도 세상이 넓고 반짝였었다. 뜨끈한 국물 한 숟갈, 시원한 음료 한 모금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진다. 몸속에 쌓였던 피로가 사르르 녹는다. 반짝이는 강물 위로 햇살이 부서지고, 그 순간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충분히 보람 있다.
돌아오는 길엔 서구 8경 중 하나인 만귀정에 잠시 들렀다. 연못엔 연꽃이 곱게 피어 있고, 백일홍·버드나무·단풍나무·소나무·벚나무가 어우러져 정원을 지키고 있다. 버드나무 그늘 아래선 짝을 찾지 못한 매미가 애절하게 울고, 그 소리가 늦여름의 풍경에 묘한 쓸쓸함을 더한다.
시원한 바람이 땀과 열기를 씻어내고, 마음까지 맑게 해준다. 이곳 만귀정은 전북 남원 출신의 효우당(孝友堂) 장창우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정자다. ‘만귀(晩歸)’라는 이름엔 노년에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는 유교적 예를 실천하며 아버지를 위해 3년간 시묘살이를 했고, 그 효심은 ‘호랑이가 여막을 지켜주었다’는 전설로까지 전해진다. 이 정자는 단순한 휴식처가 아니라, 한 사람의 깊은 마음과 삶이 녹아든 자리였다. 그의 인내와 정성, 그리고 조선 선비의 삶을 마주하며, 나도 문득 어머님 생각이 났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신 지 10여 년. 다하지 못한 효가 여전히 마음 한편에 남아, 조용히 죄송한 마음이 밀려온다. 오늘의 25km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었다. 늦여름의 바람과 꽃, 갈대, 새소리를 온몸으로 느끼고, 승촌보에서의 여유와 만귀정에서의 사색까지 함께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건강과 행복, 계절의 아름다움 속에서 조선 선비의 가르침까지 되새길 수 있었던 뜻깊은 여정. 이 모든 순간이 고맙다. 오늘도 감사한 하루였다.
임철진 전 광주 서구청 민원봉사과장
AI포스트(AIPOST) 유형동 수석기자 aipostkorea@naver.com

